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엘 푸익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동시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[[블라디미르 나보코프]]와 작가로서의 삶이 비슷하다보니 공통점이 많았다.[* 나보코프가 미국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쳐서 생계를 해결했던 것과 비슷하게 푸익도 미국 내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해결했으며, 소설 내 사회적 금기를 언급한 것으로 인한 논란, 정치적인 이유(나보코프의 경우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이유로 [[러시아 혁명]] 당시 어린 나이에 본국에서 정든 집을 놔두고 독일로 망명해야 했으며, 이후 동생이 나치에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졌다.)로 본국에서 추방되어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살아온 점이 겹친다. 말년에 나보코프는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사는 대신에 스위스에 한 호텔에서 거주했는데 이는 마누엘 푸익도 평생 유럽과 중남미, 미국 등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각지를 전전하는 삶을 이어갔던 것과 그대로 겹친다.] [[러시아계 미국인]] 소설가 [[블라디미르 나보코프]]도 푸익과 마찬가지로 초기작들은 주로 모국어로 썼으나 후기 작품들은 영어로 초고를 썼던 것이다. 두 사람 모두 결국 말년에 가서는 결국 모국에서 모국어로 소설을 출판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영어로 소설을 출간하는 편을 택했다. 나보코프는 강경 친미 반공[* 한 번은 프랑스인 만평가 한명이 나보코프가 영문학의 최고봉으로 미국을 평정했다고 나보코프가 성조기를 밟고 서있는 모습의 만평을 그리자, 나보코프가 자신은 자유의 상징인 성조기를 밟고 있을 수 없다면서 만평가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한 사건도 있었다.], 푸익은 극좌로 정치성향은 정 반대였으나 두 사람이 성향은 반대라기보다는 놀랍도록 비슷하다. 이들은 모두 모국의 기존 사회의 권위에 저항하고,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던 자유분방한 예술가 겸 지식인이었던 것이다. [[분류:아르헨티나 소설가]] [[분류:1932년 출생]][[분류:1990년 사망]][[분류:아메리카의 양성애자]][[분류: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